929억 지출내역 불분명
靑, 침묵 속 표정관리

단일 복합유통센터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파이시티 사업의 로비 실태가 드러나면서 정국에 메가톤급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파이시티 이정배 전 대표가 구속된 브로커 이동율씨에게 로비 자금으로 건넸다고 주장하는 자금은 61억 원. 이 가운데 검찰이 증거 등을 통해 현재까지 밝힌 액수는 11억여 원이다. 이에 검찰 안팎에서는 파이시티의 인허가 로비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 국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사업 비자금’의 규모를 보면, 드러나지 않은 로비 자금의 실체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비자금 규모만 무려 2,500억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출금만 1조 5,000억 대
이정배 전 대표가 조성한 로비자금이 과연 어느 정도 규모일지 또 누구에게 전달되었을지가 이번 파문의 핵심이다. 검찰이 현재까지 밝혀낸 액수는 21억 여원으로 2007∼2008년 이 전 대표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게 전달해 달라며 브로커 이동율씨 계좌로 보낸 돈이다. 이에 앞서 2010년 11월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이 전 대표를 배임·횡령 혐의로 수사하면서 밝혀낸 횡령액은 334억 원인데, 이 돈도 대부분 이 전 대표의 로비자금으로 쓰였을 것으로 수사 당국은 보고 있다. 실제로 이 중 현금 43억원과 180억원 상당의 시행사 주식이 우리은행 대출담당 직원에게 건네졌다.
하지만 부동산 개발사업 인허가에 사활을 걸었던 이 전 대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마저도 일부에 불과하며, 로비 액수는 훨씬 더 컸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전 대표가 금융권에서 받은 대출금은 무려 1조5,000억원 대에 달한다. 이 가운데 특히 검찰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 전 대표가 2008, 2009년 토마토저축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1,200억 원의 행방이다. 이 전 대표는 2008년 부산양풍저축은행으로부터 차명으로 600억 원의 대출을 받았다. 부산양풍저축은행은 이후 토마토저축은행에 인수됐는데, 이 전 대표는 “개발이익만 1조원이 넘는 대형 사업"이라며 신현규 토마토저축은행 회장을 설득해 2009년에 추가로 600억 원을 대출받았다.
이 돈은 파이시티의 공식 회계로 처리되지 않아 파이시티 법정관리인도 최근까지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차명으로 대출돼 금융감독기관에 의해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돈으로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 이 전 대표가 마련한 로비자금의 또 다른 '저수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와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은 현재 1,200억원 대출 과정에서의 불법성 여부와 사용처를 파악 중이다. 특히 대검 중수부는 이 전 대표가 이 돈을 대출받은 시기가 건축허가를 받지 못해 사업이 지체되면서 채권자들의 압박에 시달렸던 때라, 그 상당 부분이 인허가 로비를 위해 사용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검찰, 드러나지 않은 로비 자금 추적
또 이와 별도로 파이시티 채권단이 지난해 5월 이 전 대표 등 전 경영진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지출내역이 불분명하다고 밝힌 929억 원 역시 로비 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4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이 전 대표 등 파이시티 전 경영진 8명은 지난해 5월 법정관리인에 의해 제소돼 손해배상 조사확정 재판을 받고 있다. 손해배상 조사확정 재판은 회생 및 파산 과정에서 진행되는 일종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으로 이 전 대표 등에게 총 1,291억 원이 청구된 것이다.
법원의 조사위원(회계법인)은 파이시티의 재산 및 기업 가치에 대해 실사한 결과 지출 내용이 불분명한 자금이 929억 원이라고 보고했다. 부당대여금 668억 원, 사업인수 관련 부당지출 252억 원, 분양홍보비 9억 원 등이다. 보고서에는 관계사 대여금의 실질적인 사용처를 알 수 없고, 회수 가능성이 작으며, 토지 인수를 위해 리베이트 명목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지출이 있다고 밝혔다. 용처가 드러나지 않은 이들 자금이 로비나 비자금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이 전 대표의 비자금은 단순 계산상으로 최대 2,500억 원에 달할 수도 있다. 검찰도 “비자금 중에서 상당액이 로비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수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대검 중수부가 지난 25일 곽 모 전 파이시티 자금담당 상무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것도 비자금 출처 규명이 목적이었다. 이 전 대표와 같이 대우그룹 출신인 곽 전 상무는 이 전 대표의 자금 출처 및 사용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로 꼽힌다. 검찰 안팎에서는 이 전 대표가 브로커 이 씨에게 줬다고 스스로 밝힌 61억 원을 훨씬 넘어서는 로비 자금이 수사 진행에 따라 드러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침묵하는 청와대
사태가 일파만파를 일으키는 가운데 현 정부 실세들의 비리 의혹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고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입을 굳게 닫고 ‘침묵 행진’을 벌이고 있다. 이 대통령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파이시티 관련 측근들의 비리 의혹을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신문과 방송을 통해 민심을 파악하는 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이 대통령이다. 민정수석실에서도 관련 내용을 보고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 26일 “이번 정부의 출범과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비리 의혹에 연루된 상황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신다”고 이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를 전했다. 또 “개인에 대한 걱정보다는 이번 사건이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되고, 국정운영을 어렵게 만드는 상황에 대한 걱정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일단 침묵을 지키며 검찰의 수사를 지켜볼 것으로 전망된다.

최시중, 왜 갑자기 수술하나
한편, 이정배 전 파이시티 대표로부터 8억원 가량을 받은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다음달 14일 심장혈관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의 한 대형 종합병원을 예약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최 전 위원장은 이에 대해 “심장 대동맥류에 지병이 있어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입원했는데, 이번 사건 수사를 받으면서 급격히 증세가 악화돼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최 전 위원장은 심지어 "몸이 너무 좋지 않아 힘들다. 생명에 지장을 느낄 정도"라고까지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지난 25일 최 전 위원장 소환 조사 과정에서 수술 예약 사실을 전해 듣고 14시간 넘게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이면서도 충분한 휴식시간을 제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사결과, 최 전 위원장이 순순히 금품수수 사실을 시인하게 된 것은 ‘협박 사진’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돈을 받는 장면이 담긴, 옴짝달싹 못할 사진 물증이 결정적 단서가 된 셈이다. 검찰 등에 따르면 브로커 이 씨의 운전기사였던 구속된 최 모씨는 최 전 위원장이 이 씨에게서 현금 보자기를 받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지난해 12월 최 전 위원장을 상대로 “공개하겠다”며 협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놀란 최 전 위원장이 사진을 없애는 대가로 최 씨의 요구대로 이 씨 등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억 원을 건네 줬다는 것. 최 씨는 그 돈으로 대전에서 신발가게를 차린 것으로 전해졌다. 최 전 위원장으로서는 사태가 외부로 불거질 가능성에 미리부터 대비했을 수도 있다. 사진의 존재와 관련, 검찰 관계자는 “최 씨가 사진을 찢어 버려 물증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아울러 1억5,000만원을 받은 시점도 2006∼2007년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가법상 알선수재 혐의의 공소시효가 5년이라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풀이된다. 검찰 수사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최 전 위원장이 2007년 4월 이후 돈을 받은 정황에 대해서도 충분히 수사를 진행했다"며 "장기간 같은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면 가장 마지막에 받은 돈부터 공소시효가 적용되기 때문에 2007년 4월 이전의 금품수수도 포괄일죄로 처벌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최 전 위원장의 수술 시점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법원의 선처를 구해 구속을 피하겠다는 '전략'이 아니냐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구속영장 발부에 크게 영향을 미칠 변수라고 보지는 않는다"며 "설령 수술 필요성이 있더라도 구속집행정지 사안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취재_김성훈 기자